참고말씀: 롬 10:9-15
목표: 십자가의 참 의미를 깨달으며 십자가를 전하는 우리가 되자.
십자가는 로마제국 시대에 널리 사용된 사형틀이었습니다. 곧 십자가는 피 비린내와 각종 악취로 가득 차 있는 나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아무도 이 십자가를 귀하게 여겼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십자가가 왜 그렇게 위대해 졌습니까? 무엇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볼 때 숙연해 지도록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떠합니까? 당신은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알고 있으십니까? 우리 이 시간 십자가와 나와의 관계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1.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첫 번째 강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무슨 말로 비 방했습니까? (눅 23:39)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눅 23:35 이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 모습을 보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비웃고 희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네가 그리스도라면, 정말 네 말대로 네가 참 유대인의 왕이라면 네 자신을 한 번 구원해 보라 그러면 우리가 너를 믿겠노라고 예수를 놀려댔습니다. 이들은 참으로 무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두 강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첫 번째 강도는 예수를 비방하는 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예수님을 비방하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속함으로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시키기 위하여 이 세상에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자기 옆에 두고 그분을 비방했으니 그는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우리가 보통 어떤 사람을 어리석다고 합니까?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사람을 두고 어리석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첫 번째 강도는 무엇을 모르고 있었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하는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통일교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이것은 예수님의 실패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돌아가시기 위해 오셨고 이날 십자가에서 우리들의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하신 일곱 마디를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그 일곱 마디 중에 여섯 번째가 “다 이루었다”입니다. 이것은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당시의 상업적인 용어로 “빚을 다 갚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강도 자신을 위해서, 곧 그의 죄를 사해 주시고 그의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해서 이때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계신데 그는 예수님과 자기 자신이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만일 그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예수님을 비방했을까요? 그럴 수 없겠지요. 그러나 그는 어리석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삶에 있어서 무가치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모든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이 십자가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두 번째 강도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눅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가 있으리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들 중에 두 번째 강도는 첫 번째 강도와는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예수를 비방하는 그 강도를 꾸짖었으며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눅 23:40 을 보면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라고 했고, 41절을 보면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42절에 그는 말하기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부를 때 그는 “선생님이여” 이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또는 “의인이시여”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여”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가브리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이제 곧 태어날 아기에게 주라고 주신 이름인데 마 1:21을 보면 예수라는 뜻은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번째 강도가 “예수여”라고 불렀을 땐 바로 자신 옆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구세주로 인정한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두 번째 강도는 오직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답변을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러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가 있으리라” 그는 이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럼 이 구원받은 두 번째 강도와 구원받지 못한 첫 번째 강도와 다른 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저들은 똑같이 세상에서 강도짓을 하다가 죄 값으로 이날 사형집행을 당했던 범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각기 십자가를 이해하는 관점이 달았습니다. 곧 구원받은 두 번째 강도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의 모든 소망이었고, 구원받지 못한 첫 번째 강도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지 죄인의 사형틀에 불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에게 무슨 의미를 주고 있습니까?
3. 바울 사도는 무엇이 아름답다고 말했습니까? (롬 10:15)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
롬 10:13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면서 그는 계속 말을 하기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롬 10:14-15). 이 말씀은 결국 한 사람이라도 예수를 믿으려면 누군가 그에게 가서 복음을 들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당시는 미디어가 아직 발달되기 전이기 때문에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려면 그 영혼을 찾아 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미디아가 발달 된 오늘날은 우리가 영혼을 찾아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세상 문명이 발달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복음을 들고 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가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롬 10:15 하반절에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이 있습니다.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여기 이 말씀에서 발이라고 쓴 말에 특별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신체 중에 발은 걸어가는데 혹은 뛰어가는데 필요한 지체입니다. 그러면 롬 10:15의 뜻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기 복음을 들고 찾아가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매일 걷고 뛰고 목적지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외부 신체 중에서도 발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질문은 과연 우리의 발은 아름답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발은 늘 어디로 가고 있으며 이 발은 복음과 함께 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복음을 들고 가야만 합니다. 우리 자신이 선교사님들처럼 복음을 들고 멀리는 못 간다 할지라도 우리 주위의 가까운 곳이라도 찾아가야 합니다. 3월 25일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그리고 31일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모르고 죽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렇다면 이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에게 복음을 들고 찾아가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번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더욱 더 복음에 열정을 가지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가십시다. 참으로 우리의 발을 아름다운 발로 만드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적용:
1.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과 나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2. 나의 발은 어디로 늘 가고 있는가?
나의 발이 마지막으로 복음을 들고 갔던 때는 언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