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말씀: 롬 10;17
목표: 오늘 말씀의 부자처럼 오해하여 후회하는 자가 되지 말자.
사람은 누구나 살다 보면 가끔 오해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지식이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종종 잘못 사람들을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오해가 있다는 것이 정상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면 뉘우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말씀 중에서도 구원 혹은 내세에 관한 것들에 오해가 있다면 오늘 본문 말씀의 부자와 같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과연 이 부자는 구원과 내세에 관해서 어떠한 점들을 오해했었습니까?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무지했던 부자처럼 어리석은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 부자가 죽어 음부에서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부탁했던 내용은 무엇인가? (눅 16:23-24)
나사로로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거지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장사되었다고 기록되었지만 나사로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부자의 장례식은 분명 호화스러웠을 것입니다. 나사로는 장례식도 없었고, 누군가 그 시체를 땅에 묻었겠지요. 그러나 내세의 세계에서는 완전히 반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나사로가 깨어난 곳은 아브라함이 있는 아름다운 낙원이요, 부자가 깬 곳은 고통이 있는 음부였습니다.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보니까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 멀리 있는 나사로를 그는 불렀습니다. 땅에 살 때에는 무시했던 나사로, 손찌검 했던 나사로, 그가 이제야 귀하게 보였습니다. 왜 부자가 나사로를 불렀을까요? 아니 자기 친구들을 부르지 왜 나사로를 불렀겠습니까? 이 말씀을 묵상해 볼 때 부자의 친구들 중에는 한 사람도 나사로가 가 있는 낙원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아는 사람이라고는 나사로뿐인데 부자는 나사로에게 희망을 잔뜩 걸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하기를 나사로로 하여금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 중에 있었으면 감히 물을 한 컵 달라는 말을 못하고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달라고 했겠습니까? 그 어려운 고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목이 마르는 정도가 아니라 혀가 마르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이 부탁을 하고 있는 이 부자는 또 한 가지를 오해했습니다. 그는 낙원에 가 있는 사람이 음부에 있는 사람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낙원에서 편히 있는 나사로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는 자신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했는데 그의 대답은 “불가능하다.”였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혹시 우리 중에도 이러한 오해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죽은 후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기회들이란 우리의 생명이 붙어있는 동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지 말고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우리는 살려야 합니다.
2. 어떻게 하면 자기의 다섯 형제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 부자는 생각했는가? (눅 16:27-28)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자기 형제들에게 증거하면
이제 아브라함이 그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다고 하니까 부자는 이제 다른 부탁을 다시 했습니다. 내용인즉 나사로를 부활시켜서 자기 아버지의 집에 보냄으로 자기 형제 다섯에게 이 모든 것을 증거하게 하여 그들은 자기가 고통 받는 이 음부에 오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부자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간절한 심정을 이해 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는 또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이 기적을 보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줄로 오해했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서 증거하면 믿겠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자의 또 한 번의 오해였습니다. 그래서 이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그에게 정확하게 말해주었습니다. 29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여기서 모세와 선지자는 구약 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저들에게 있으니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 라는 말이지요. 이 때 부자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왜 이렇게 이 부자는 대답했을까요? 분명 그는 살아생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을 붙잡고 의지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하나 그 말씀을 무시하고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그는 지금 음부에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형제들도 하나님의 말씀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그는 말했던 것이지요. 자기 형제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는 있지만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있으니 자기처럼 이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무엇이라고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까?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기적을 저들이 보면 믿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부자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31절을 보시면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오직 구원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믿음입니다. 그럼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입니까?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이암았느니라” 믿음은 보는 것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죽기 전의 부자와 죽은 후의 부자의 관심을 비교해 보라. (눅 16:19-31)
죽기 전: 모든 관심이 육신적인 것에 있었다
죽은 후: 모든 관심이 영적이 것에 있었다
죽기 전의 이 부자, 얼마나 육을 즐기고 살았었습니까? 영적인 관심은 조금도 그에게 없었습니다. 마음껏 육신의 정욕을 위해서만 살아 왔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후의 그의 모습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옵니까? 그의 마음에 무슨 생각이 있습니까? 그의 마음에는 오로지 자기 형제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살았을 때 언제 그에게 이러한 관심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죽고 나서 모든 관심의 초점은 구원에 가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왔습니까?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회개하는 말, 그가 살아 있었을 때 이런 관심을 갖고 그가 회개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또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고통 받는 곳, 곧 음부입니다. 보통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지옥입니다. 지옥에 가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살아있을 때 그가 했겠냐고요? 그러나 그렇게 당당했던 그 부자도 죽으니 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살았을 때나 육신적인 것을 추구하지 일단 죽고 나면 모든 관심이 영적인 것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육신적인 생각은 잠깐이요 영적인 생각은 영원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참 지혜로운 사람은 육을 가지고 사는 동안에도 영적인 것을 바라보고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영적인 것에 있습니다. 내 가족들 중에, 친척들 중에, 친구들 중에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분들이 계십니까? 나를 향한 이분들의 생각은 오직 나의 영적인 삶에 초점이 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이 땅에서 얼마나 잘 사느냐가 아닙니다. 앞으로 천국에서 멋진 영생을 얻게 되기를 저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이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이 땅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적용:
1. 예수 믿기 전과 믿은 후의 나는 삶의 스타일에 있어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셀원들 과 함께 나누어 보세요.
2. 오늘날 나의 모든 관심은 어디에 가 있는가?